책과 논문

조해진, <완벽한 생애>

밭 벼 2023. 2. 18. 18:00

조해진, 2021, 창비, <완벽한 생애>

 

완벽한 생애

소설Q 시리즈. 직장을 돌연 그만두고 제주로 향하게 된 윤주, 윤주의 제주 생활 동안 그의 방을 빌리며 한국여행을 하게 된 시징, 꿈을 접고 신념을 작게 쪼개기 위해 제주로 이주한 미정의 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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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인생은 다른 사람의 그것과 연결되어 있어서, 제주로 이주하자 서울 사는 친구가 제주로 놀러오고, 그렇게 잠시 비게 된 집을 에어비엔비에 내놓아 홍콩에서 서울로 들어온 사람도 있고, 그렇다. 한 사람의 움직임이 움직임의 연쇄를 만든다. 그것은 도망의 연쇄였을까. 

 

좌절, 무기력, 우울, 죄책감이 엉겨 달라붙어 걸음을 내딛지 못하고 있는 지리한 나날이 있다. 나는 조해진이 전하는 이 감정들을 '부채감'이라고 부르는데, 글쎄 왜인지 나의 경우에는 이런 감정이 타인게 빚을 진 듯 느껴져 그렇다.

 

여하튼 조해진은 미처 떨쳐버리지 못한 이 감정들에게서 거리둘 수 있는 용기를 찾아나선 사람들을 그린다. 거리라는 게 대단치 않다. 그냥 한 발자국 만큼의 거리다. 용기내어 타인의 방에 도착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그곳은 시간이 다르게 흐른다. 기대와 다른 삶을 사는 사람들을 만난다. 이 방의 주인도 나만큼이나 상처받았나보다.

 

타인의 방에서 나는 역시 나만큼이나 어두운 상처를 본다. 우리의 잘못이 아니구나. 조금 용서해도 괜찮지 않을까. 무심히 나를 떠나간 애인. 전쟁에 참여했던 아버지. 나보다 먼저 죽어버린 나의 딸. 사실 용서의 방향은 자신을 향하고 있었음을 느낀다. 나를 용서하기 위해 무시무시한 용기를 내야 했음을 저자는 안다. "구출은 때로 도망처럼 보인다."

 

 

(불현듯 과거에 붙잡히는 나를 염려했는지) 친구가 결혼 선물이라고 추천해준 책이다. 친구는 "네가 이 책을 어떻게 읽을지 궁금해"라고 했다. 그러게. 나는 여전히 부채감 속에 살고, 부채감은 나의 주요한 동력원 중 하나다. 부채감에 감사할 만큼 내 인생이 호사스럽진 않지만 그렇다고 나쁘지도 않다. 과거가 현재를 집어삼킬 때 주변 사람들 덕분에 적절한 거리를 만들 수 있었다. 그것이 나의 구출이었나보다. 

 

과거가 눌러 붙어 있는 방바닥에서 힘차게 발걸음을 내딛어 보자. 발바닥을 내딛은 거리 만큼 나는 용기내어 왔다. 그만큼의 구출은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 p. 50. 그러게, 지나고 나니 다 그냥이 되네. 

 

  • p. 85. 부서지기 쉬운 구조물 위에 집을 지은 신념...

 

  • p. 144. 이사 갈 아파트에 에디의 짐도 들여야 했으므로 시징은 짐정리 중에 자신의 소지품을 최대한 정리했고, 특히 과거 속에 멈춰 있는 물건들은 거의 다 버렸다.. 이삿짐 트럭이 오기 전에 점심을 해결하자며 에디는 커피와 샌드위치를 사러 나갔고, 시징은 발바닥에 힘을 주며 휑뎅그렁한 아파트 곳곳을 느리게 걸었다. 

 

  • p.166. 소설가 최진영의 발문
    • 슬픔과 고통과 이별에는 충분한 시간과 확실한 공간이 필요하다. 그것을 애도의 시공간이라 부를 수도 있을까. 애도 없이 찾아오는 변화와 평화는 과도하게 진압된 평온과 다르지 않다. 애도가 없는 곳에서 상처는 덧날 것이다. 거칠게 묻어버린 과거는 생생하게 살아 돌아올 것이다. 악몽은 반복될 것이다. 질문과 대답은 어긋날 것이며 아무도 이별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할 수도  없을 것이다. 불행의 공동체에서 한 사람의 흐느낌 뒤편은 아주 광활한 암흑 같다. 그들 사이에 있을 때 우리는 서서히 깨달을 수 있다. 우리의 불행은 우리의 잘못이 아니라는 자명한 사실을. 

 

  • p.163. 소설가 최진영의 발문
    • 구출은 때로 도망처럼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