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논문

한강, <작별하지 않는다>

밭 벼 2022. 12. 31. 16:38

한강, 2021, 문학동네, <작별하지 않는다>

작별하지 않는다

2016년 <채식주의자>로 인터내셔널 부커상을 수상하고 2018년 <흰>으로 같은 상 최종 후보에 오른 한강 작가의 5년 만의 장편소설. 2019년 겨울부터 이듬해 봄까지 계간 <문학동네>에 전반부를 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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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가 고향이다. 제주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작품들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생각하는 제주의 아름다움은, 이면에 얼룩진 폭력과, 차마 말로 표현하지 못할 고통을 이야기하지 않고서는 다룰 수 없다.

한강씨가 (어째서인지 나는 작가 한강에게 꼭 '-씨'를 붙이게 되는데, 언제부터 무엇을 계기로 그리 되었는지 모르겠다.) 제주 4.3에 대해 장편소설을 썼다니, 안 읽을 도리가 있나. 고통에 다가가기 위한 고통받는 글쓰기에 많이 울고 감탄했다.

책은 더디게 진행된다. 본격적인 진실은 책의 후반부에 나온다. 섬 사람 모두가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설명 불가능한 폭력의 진실에 다가가기 위해, '나(경하)'는 생-사, 현실-환상을 오간다. 전화도 안 되고, 길도 끊기는 곳에서 눈밭을 굴러 겨우 도착한 곳은 바람이 분다. 작은 신음소리 같은 바람이. 그곳에서 작은 상자를, 꺼질 듯한 촛불을 켜서 살펴본다.

상자에는 빛바랜 편지와 사진, 신문 기사들이 있다.
엄마의 사그라들지 않는 기억이다. 고통이고 싸움의 기록이며, 가슴에서 이는 사랑의 불이다.

엄마가 당숙네 집에 잠깐 심부름 다녀오는 사이 마을 사람들이 모조리 보리밭에서 총살당했다. 눈 쌓인 보리밭에서 어머니와 아버지의 시신을 찾았다. 이상하게 오빠와 막내 동생의 시신이 안 보인다. 도망친 걸까? 어디로든 도망가 살아있기를 바라며 어린 두 소녀가 피묻은 시신들을 모두 살핀다. 막내 동생을 찾았다. 배에 구멍이 나 피가 새어나온다. 턱 밑에도 구멍이 있다. 손가락을 베어 물어 입에 피를 흘려 넣어주었더니 그걸 받아 먹는다. 나를 기다렸겠지. 언니가 돌아와 구해줄거라며 기다렸겠지.

오빠가 고구마 창고에 감금되어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오빠가 살아있음에 기뻐 한달음에 고구마 창고로 갔다. 젊은 남자가 10분동안 오빠를 몰래 만나게 해주었다. 포마드로 머리에 멋을 부리던 오빠인데, 영 이상한 머리를 하고 있기에 오빠 머리 이상하다고 해버렸다. 천운이 따라 오빠를 한 번 더 만났다. 오빠는 물을 묻혀서 머리를 만졌다. 이제 오빠 머리 안 이상하지? 라고 물었다.

사랑하는 너를 잃어 마음의 불길이 사그라들지 않는다.
엄마는 오빠의 흔적을 찾아 전국을 돌아다녔다.
수 십 만 명의 사람들이 이름도 없이 묻혀 있다.

살아 도망쳤다는 사람이 오빠일까. 이 뼈가 오빠인가. 아니면 저 뼈가 오빠인가.
이름 없는 뼈가 참 많다. 수 십 만 명의 뼈가 여전히 뒤엉켜서 콘크리트 밑에, 아스팔트 밑에 있다.

눈밭 나무는 모조리 잘려나가 둥치밖에 남지 않았다. 헌데 그 나무 둥치가 서로에 기대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게 서로를 위로하며 작별하지 않은 채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 p. 265. 처음과 달리 외삼촌은 멍해 보이지 않았대. 정숙아, 정심아, 하고 이름을 부르고, 방금 물을 묻혀서 만진 것 같은 머리를 가리키며 엄마에게 말했대. "인제 오빠 머리 안 이상함지?" ... 다시 다음주를 기다려 자매가 같은 장소로 갔는데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대. 한 시간 가까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근처 집에 사는 아주머니가 담장 너머로 이모에게 소리쳐 말해줬대. 창고에 있던 사람들을 간밤에 배로 실어갔다고. 남의 말만 믿고 자리를 떴다가 엇갈리면 안 된다고 어두워질 때까지 기다리자고 이모가 엄마에게 말했대. 엄마는 가끔 졸기도 하고, 음식 냄새를 맡은 어느 집 개가 왔기에 머리를 쓸어주고 목을 간질여줬는데, 이모는 눈길 한 번 안 주고 길모퉁이만 보고 있었대.

  • pp.290~291. 반달이 떴는데 구름 한 점 없이 밝은 밤이었답니다. 피투성이 옷을 입은 앳된 청년이 갈아입을 옷을 달라고, 이 집에서 옷을 얻은 걸 아무한테도 말 안 할 테니 부탁한다고 사정했대요. 후환이 두려운 시절이라 두 집은 거절했는데 한 집에서 옷을 내줬답니다. 그 청년은 그걸 받자마자 얼른 마당에서 갈아입고 날래게 달음박질쳐서 사라졌답니다. ... 정신을 차리고 옆을 보니 엄마가 쪼그려앉아 토하고 있었다고 했어. 위액만 게워져 나올 때까지 계속.

  • p.297. 그때 내가 무사 오빠신디 머리가 이상하다고 해실카? 무사 그런 말밖에 못해실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