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논문

룰루 밀러,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밭 벼 2022. 12. 31. 14:45

룰루 밀러, 2021, 곰출판,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집착에 가까울 만큼 자연계에 질서를 부여하려 했던 19세기 어느 과학자의 삶을 흥미롭게 좇아가는 이 책은 어느 순간 독자들을 혼돈의 한복판으로 데려가서 우리가 믿고 있던 삶의 질서에 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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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올해는 무얼 잘 했나~' 했더니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블로그와 인스타에 독서 기록을 남기기 시작한 일이더라.
그래서 올해가 지나기 전에 두 권 더 기록으로 남기기로 결심. 기록으로 미처 남기지 못한 책들이 많지만, 특히나 올해를 넘기면 아쉬울 것 같은 두 권을 골랐다. 룰루 밀러의 책이 그 중 하나.


책은 스탠포드 대학의 초대 학장이자 어류학자인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전기..인 척 한다. (다른 이야기이지만, 미들 내임이 스타Starr라니 멋지지 않은가. 누구에게나 멋진 미들네임이 필요하다.) 뒤에 무슨 내용이 나올지 도통 알 수 없으니 전기보다 서스펜스 스릴러에 가깝겠다. 그래서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 살인을 했다는 건가? 그는 위대한 학자인가? 인생의 빛으로 삼을만한 사람인가? 룰루 밀러는 독자를 소설의 선형성에 붙잡고, 챕터를 차례차례 읽어 내려가야 하는 독자에게 정보를 천천히 풀어낸다.

그는 계통분류학의 관점에서 어류를 연구했다. 생의 모든 에너지를 모아 생물이 진화한 '신성한 사다리'를 그리려 했다. 조던은 그렇게 신의 질서를 알 수 있으리라 여겼다. 당대 많은 학자들이 그렇게 생각했다. 그에게 어류는 숨은 질서가 발견되길 원하는 신의 증거다. 명명은 성스럽다. 명명이야말로 조던에게는 파괴되지 않을 무엇이었다. 지구의 모든 어류를 발견하고 이름을 붙이자. 이름이 떨어지지 않게 아예 이름표를 실과 바늘로 물고기의 턱밑에 꿰매자.

상상해보자. 수천종의 물고기가 턱 밑에 이름표가 달린 채 표본이 되어 보관되어 있다. 기괴하지 않은가.


얼마 지나지 않아 기괴함은 혐오감으로 바뀌는데, 그가 살인을 저질렀을 수도 있다는 개연성 있는 이야기는 본론이 시작되기 전 빌드업에 가깝다. 저자는 조던이 우생학을 신봉하고 그것의 '과학적' 근거를 제공하는 데 힘썼으며, 과학은 국가적 차원의 폭력을 자행했음을 보여준다. 조던은 세상의 '부적합자'를 찾아 불임화해야한다 주장했다. 그의 폭력은 도덕적이지 못할뿐만 아니라 과학적으로도 틀렸다.

책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여기서 멈췄으면 베스트셀러가 되진 못했을거다.) 룰루 밀러에 따르면, 현대 계통분류학에서 어류라는 종은 더이상 다수의 지지를 받고 있지 못하다. 그러니까, '어류'라는 종은 없다. 물고기는 종이 아니다! 조던은 존재하지 않는 것 위에 이름표를 단 물고기 표본을 올려 진리의 상아탑이라는 허구를 만들고, 폭력을 행사한 자에 불과하다.

신성한 사다리는 없다.
그렇게 어류를 통해 생명의 나무를 들여다보려 했던 조던의 지위, 권력은 근거를 잃는다.

지구 상 생명체들의 위계를 확인하는 사다리는 없다. 위계 없음이 무지와 무력을 의미하진 않는다. 한 데 뒤엉켜 불분명하고 애매하며 복잡하다면, 그건 다만 내가 이해하지 못할 다양한 힘들이 세상을 움직이고 있다는 뜻이다.

진리보다 작고, 소박한 행동들이 세상을 움직이고, 나로 하여금 살아가게 한다. 이 사실이 부당한 폭력에서 당신과 나를 구할 것이다.


  • p. 44. 자연에 도덕률..이 감춰져 있다는 이런 생각은 고대 그리스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꼭대기에는 인간이 있고, 이어서 동물과 곤충과 식물, 바위 등으로 이어지는 연속체상에 모든 생물을 하등생물부터 신성한 생물까지 차례로 배열할 수 있다는 "신성한 사다리"개념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최초로 구상했고, 후에 "스칼라 나투라이"라는 라틴어로 번역되었다. ... 생물을 제대로 된 순서로 배열하면 신성한 창조주의 의도뿐 아니라 어쩌면 더 진보할 방법에 관한 실마리까지 알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 p.206. 이것이 바로 다윈이 독자들에게 알려주려고 그토록 노력했던 점이다. 사다리는 없다. ..."자연은 비약하지 않는다"고 다윈은 과학자의 입으로 외쳤다. 우리가 보는 사다리의 층들은 우리 상상의 산물이며, 진리보다는 "편리함"을 위한 것이다.

  • pp. 222~223. "어떻게 게속 살아가시는 거예요??" ... 애나도 답을 알지 못해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 그 때 메리가 불쑥 말했다. "나 때문이지!" 애나가 웃기 시작했다. "그렇지. 물론이지. 메리 때문이야." 그것은 농담이었고, 우리 모두를 실수로부터 구해주는 메리의 방식이었다. ... 이렇게 세월이 흐른 뒤에도 애나는 여전히 메리를 보살피고 있다. ... 이 지구에서 자신이 뽑아낼 수 있는 소박한 기쁨들로 메리에게 설렘과 기쁨을 안겨주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 p. 268. 이 사다리, 그것은 아직도 살아있다. 이 사다리, 그것은 위험한 허구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 말은 그 허구를 쪼개버릴 물고기 모양의 대형 망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