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논문

커트 보니것, <타이탄의 세이렌>

밭 벼 2022. 12. 29. 18:55

커트 보니것, 2022, 문학동네, <타이탄의 세이렌>

타이탄의 세이렌

블랙유머와 풍자의 대가 커트 보니것의 두번째 장편이자 수많은 팬들이 손꼽아 기다려온 작품 『타이탄의 세이렌』이 커트 보니것 탄생 100주년을 맞아 문학동네에서 출간된다. 모든 공간과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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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스포일러 없이 이 책에 대한 리뷰를 남길 자신이 없다. 책의 매 페이지가 반전이기 때문에.
커트 보니것을 처음 만나고, 앞으로 읽을 예정이며, 스포일러를 원하지 않는다면 이 리뷰는 읽지 않으시는 게 좋겠다.

사정이 그러하니 잠깐의 여백을 두겠습니다.


...


인생 어차피 운칠기삼이라고 하면서도 나는 마음속 깊이 이 말을 받아들이지는 않는데, 이 말을 받아들였을 때에 찾아올 허무를 견디지 못할 것 같아 그렇다.

내 인생, 지구를 떠나 화성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친구를 잃고, 수성으로 떠나 사랑하는 사람을 되찾겠다는 일념으로 탈출 방법을 궁리하고, 기어코 지구로 돌아와, 결국에는 사랑하는 사람과 토성의 위성인 타이탄에 도착하게 되는 이 모든 시련의 결과가 메시지를 배송하기 위해서임을 알게 된다면, 그 허무를 어떻게 이해해야하나.

아마도 위대한 뜻이 있나보다! 나의 삶은, 영웅의 고난이 죽음과 맞닿는 찰나의 순간에 숭고한 의미가 부여되듯, 위대한 어떤 뜻이 있어서 그렇게 혼란스럽고 고통스러운가보다. 그렇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고통스러울리 없다. 그러나 마침내 그 끝은 창대할지니, 세상을 구할 어떤 미묘한 뜻이 있어 그렇게 먼 길을 떠나야 했나보다.

그렇게 '충실한 배달부' 맬러카이 콘스턴트는 우연에 희생당했다.


맬러카이 콘스턴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아주 중요한 부품을 배송하고 있었다. 그렇다. 부품 하나. 우주선이 고장나 잠시 (그들의 삶에서는 잠시이겠으나, 인류에게는 역사보다 긴 시간이었다) 타이탄에 정박하고 있는 기계 문명 트랄파마도어의 우편부, 샐로를 위한 부품. 위대한 문명을 일군 트랄파마도어는 지구에 인류 문명을 일으켜, 부품 하나를 샐로에게 배송한다.

그러니까 맬러카이 콘스턴트의 수난과, 당신이 겪는 희비극과, 내가 여기서 이렇게 블로그를 하고 있는 것은 모두 부품 배송을 위함이다. 당신과 나의 모든 행운과 불운은 사실 별 거 아니다. 그렇게 우리는 운에 희생당했다.

이쯤되면 트랄파마도어의 우편부 샐로가 배달하고 있는 메시지의 내용이 궁금해진다. 도대체 어떤 우주의 비밀을 담고 있길래 인류 문명씩이나 필요하단 말인가! 위대한 기계문명 트랄파마도어인들은, 위대한 문학가 커트 보니것은 인류 문명을 걸고 어떤 메시지를 샐로에게 맡겼을까.

샐로의 메시지는... 하.. 이건 정말 너무너무 스포일러라 차마 이야기하지 못하겠다.
한 가지만 기록한다. 샐로의 메시지야말로 <타이탄의 세이렌>을 관통하는 백미다. 정말 꼭 한 번 읽어보시라. 샐로의 메시지에서 내가 느낀 전율을 당신도 느낄 수 있기를 바란다.


  • p.46. 맬러카이 콘스턴트는 뉴포트의 계단 밑 굴뚝 같은 방에서 중얼거렸다. ... "내 이름은 충실한 배달부라는 뜻이에요. ... 내가 이 모든 수고를 거쳐서 트라이탄에 가는 이유가 뭐죠?"

  • p.244. 이들이 주고받을 수 있는 메시지는 두 가지뿐이다. 첫번째 메시지는 두번째 메시지에 자동적으로 반응한 결과고, 두번째 메시지는 첫번째 메시지에 자동적으로 반응한 결과다. 첫 번째 메시지는 "나 여기 있어, 나 여기 있어, 나 여기 있어"다. 두 번째 메시지는 "네가 있어서 참 기뻐, 네가 있어서 참 기뻐, 네가 있어서 참 기뻐"다. ... 이들은 하모늄이라 불린다.

  • p.409. "바보 같은 심부름을 하느라 이렇게 멀리까지 온 자라면 ... 그 심부름을 마침으로써 바보의 명예를 지키는 것 말고는 다른 선택지가 없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