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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도 슈사쿠, <바다와 독약>

밭 벼 2022. 12. 29. 16:24

엔도 슈사쿠, 2014, 창비, <바다와 독약>

바다와 독약

창비세계문학 28권. 엔도오 슈우사꾸의 장편소설. 엔도오 슈우사꾸는 전후 일본인에게 드러나는 죄의식의 부재 문제를 일관되게 작품화한 가톨릭 작가로서 초기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이 소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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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 때 읽었던 엔도 슈사쿠의 소설을 다시 읽었다.
기억하기 위해 소설을 읽는다고 했다. 아마 엔도는 잊지 않으려는 절박함에 <바다와 독약>을 쓴 듯 하다.
바람에 먼지가 풀풀 날려 흐릿해져버린 시야처럼 아득해져가는 폭력을, 어떻게 기억해야 하는가.

두려운가. 그렇다. 다시 되돌아가도 똑같이 그 폭력을 반복할 것이라는 그 사실이 두렵다.

스구로 라는 이름의 창백한 의사에게서 기흉 치료를 받게 된 '나'는 그가 일본의 2차대전 패전 직전에 있었던 '큐슈 대학 생체해부 사건'에 참여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주유소 주인은 중국 난징 대학살에 참여했다. 양복점 주인은 헌병으로서 역시나 많은 살인을 저질렀다. 그리고 먼지 쌓인 길바닥처럼 살인의 기억 위로 다른 일상이 켜켜이 쌓이고. 그렇게 살아간다.

먼지처럼 폭력의 기억이 일어나는 길 위에서 혼란스러워하던 '나'는 복권 판매상을 지나친다.
전쟁이 더 오래 지속되었으면 '나'역시 살인의 가해를 면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의 비폭력은 그저 운이다.


소설은 주로 스구로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 외 인물들의 마음을 읽는 것도 흥미롭다.)
해부실에 들어간 스구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실험도 못했고, 실험을 막지도 못했고, 실험실에서 빠져나오지도 못했다. 그는 이 사실에 고통스러워한다.

병원 옥상에서는 바다가 보였다. 밤이 되면 검은 바다에서 바람이 불었는데, 가끔 적군기의 폭격으로 번쩍번쩍 빛이 났다. 하루는 유독 바람 소리가 오래 들린다는 생각을 했다. 스구로는 공습으로 죽어가는 마을 사람들이 내고 있는 신음소리가 아닐까 생각했다. 또는 그저 바다의 파도소리일지도 모른다.

엔도 슈사쿠의 바다는 신이고 양심이면서, 동시에 신의 부재이자 양심의 부재이다. 나의 신은, 양심은 바다 위에 떠있는 하얀 뭉게구름과 같아서 새하얗게 빛나다가도 곧잘 사라진다. 없어진다. 그러면 엔도 슈사쿠는, 스구로는 옥상 위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하이얀 솜 떼를 찾는 것이다.


p. 29. "손님, 복권 사세요."

p.54.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톱니바퀴가 건물들 사이를 돌고 있는 것 같았다. ... 전쟁에서 이기든 지든 스구로는 이제 어떻게 돼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걸 생각하기에는 몸과 마음이 너무 지쳐버렸다.

p.136. 추악하다고 생각하는 것과 고통스러워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p.183. "벌이라면 세상의 벌 말이가? 세상의 벌만으로는 아무것도 안 변한다." ... "나나 니는 이런 시대에 이런 의학부에 있어서 포로를 해부한 것뿐이다. 우리를 벌주는 사람들도 같은 입장에 놓이게 되면 그땐 또 우예 될지 모르는 기라. 세상의 벌이란 그저 그런 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