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논문

신형철, <인생의 역사>

밭 벼 2022. 12. 4. 20:21

신형철, 2022, 난다, <인생의 역사>

인생의 역사

우리 문학을 향한 정확한 사랑이자 시대를 읽는 탁월한 문장, 평론가 신형철이 4년 만의 신작으로 돌아왔다. <인생의 역사>라 이름한 이번 책을 두고 시화(詩話)라 묶었으니, 한 편의 시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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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지워내는 세상 덕분에 오히려 죽음을 기억하게 되는 날이 있다. 다만 행운에 불과한 내 삶의 쓸모를 누군가가 이야기해주었으면 하는 날이 있다. 그러다 신형철의 신간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책 한 장 한 장을 최대한 천천히 읽어 넘겼다.

그의 문장은 한강씨의 장편소설 <작별하지 않는다>를 통해 처음 만났다. 추천사가 요란한 책들과 달리, 소설 표지 뒷면에는 문학평론가 신형철의 비평 다섯 문단이 실려 있었다. 그 중 마지막 문단에서 눈물을 멈출 수 없었는데, 소설 따라 '나'와 생사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그 너머에 도달할 듯 착각하면서, 가장 폭력적인 진실에 고통스러워하면서, 한강이라는 작가의 마음을 이보다 더 잘 읽어낼 수 있을까 싶었기 때문이다.

"... 누구나 노력이라는 것을 하고 작가들도 물론 그렇다. 그러나 한강은 매번 사력을 다하고 있다."


오래도록 기다리고 있었음을 미처 깨닫지도 못한 나의 마음을 제 자리에서 반기는 어떤 문장을 만났을 때의 기쁨을 문학 작품도 느끼리라. 작품들 역시 절실히 필요한 문장이 있고, 다만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어떤 평론가가 마음을 담은 비평 한 줄을 전한다. 그 한 줄이 작품을 증폭한다. 작품은 이것이 그가 기다려왔던 한 문장임을 깨닫는다. 작품이 되고, 문학이 된다. 이 책은 그런 비평들을 모아 두었다.

문학평론집이라고 하지만 문장 하나하나가 아름다운 시이다. 그러니 이 책은 시에 대한 시라고 부르는 게 맞겠다. 이상하게 잠이 오지 않는 새벽에 많은 위로를 받았다. 기다려온 문장들을 만났고, 큰 감동을 받았다.


p.96. 사랑은 세상이 고통이라는 결론에 도달하면서 끝나는 게 아니라 거기서부터 시작하는 일이다. ... "사랑합니다. 당신이 존재하기를 원합니다." 사랑은 당신이 이 세상에 살아 있기를 원하는 단순하고 명확한 갈망이다. '너는 이 세상에 있어야 한다. 내가 그렇게 만들 것이다.' 세상이 고통이어도 함께 살아내자고, 서로를 살게 하는 것이 사랑이 아는 유일한 가치라고 말하는 네 개의 단어.

p. 97. 나는 인간이 신 없이 종교적일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지를 생각하는 무신론자인데, 나에게 그 무엇보다 종교적인 사건은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의 곁에 있겠다고, 그의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일이다. 내가 생각하는 무신론자는 신이 없다는 증거를 쥐고 기뻐하는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염려하는 사람이다. 신이 없기 때문에 그 대신 한 인간이 다른 한 인간의 곁에 있을 수밖에 없다, 이 세상의 한 인간은 다른 한 인간을 향한 사랑을 발명해낼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나는 신이 아니라 이 생각을 믿는다.

p. 132. "한 사람을 죽이는 행위는 그 사람의 주변, 나아가 그 주변으로 무한히 뻗어가는 분인끼리의 연결을 파괴하는 짓이다." 왜 사람을 죽이면 안 되는가. 누구도 단 한 사람만 죽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살인은 언제나 연쇄살인이기 때문이다. 저 말들 덕분에 나는 비로소 '죽음을 세는 법'을 알게 되었다. 죽음을 셀 줄 아는 것. 그것이야말로 애도의 출발이라는 것도.

p. 168. 우리에게 필요하고도 가능한 일은, '평상시에' 누군가의 사랑이 다른 누군가의 사랑보다 덜 고귀한 것이 되지 않도록 하는 일, '유사시에' 돈도 힘도 없는 이들의 사랑이 돈 많고 힘있는 이들의 사랑을 지키는 희생물이 되지 않도록 하는 일, 그리하여 '언제나' 우릴 각자가 사랑하는 사람을 계속 사랑할 수 있는 세상을, 그러니까 평화를 함께 지켜내는 일일 것이다. 이런 것도 애국이라면, 애국자가 될 용의가 있다.

p.267. 임을 위한 행진곡은 인간임을 위한 행진곡이다. 이 노래를 우리의 국가로 사용할 수 없는 것은 과분해서다. 이 노래가 자격이 없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자격이 없어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