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논문

김훈, <하얼빈>

밭 벼 2022. 9. 24. 21:05

김훈, 문학동네, 2022, <하얼빈> 

 

하얼빈

‘우리 시대 최고의 문장가’ ‘작가들의 작가’로 일컬어지는 소설가 김훈의 신작 장편소설 『하얼빈』이 출간되었다. 『하얼빈』은 김훈이 작가로 활동하는 내내 인생 과업으로 삼아왔던 특

www.aladin.co.kr

 

해야할 말이 있어서 이토를 죽였다. 발사는 찰나. 기다리던 것은 죽음 뒤에 있을 질문들이었다. '왜 이토를 죽였는가.' 중근에게는 이토를 죽여야 할 이유가 있었다. 그에게 이토는 조선을 기망한 자이면서 천황을 기망한 자이기도 했다. 

 

중근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날카로운 사람이었지만 어찌된 일인지 이 세상에 설 곳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땅에도 하늘에도 조국이 없었다. 

 

김훈은 '청년' 안중근 그리고 싶었다. 그의 청년은 열병을 앓는다거나, 발걸음을 내딛을 곳을 못 찾는 방황과는 거리가 멀다. 중근은 조국이 없었을지언정 누구보다 굳은 뿌리를 가지고 있었다. 사냥꾼인 그의 총구 끝에는 이토가 있었다. 그가 겪었던 숱한 사냥에서와 마찬가지로 손가락은 단정하고 빠르게 방아쇠를 당겼고, 심장은 천천히 뛰었다. 

 

김훈은 안중근에게서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었을까. 그가 독자에게 보내는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지배하는 힘과 그것에 맞서는 자의 관계를 차갑게 그리는 데에는 김훈의 문장만한 것이 없지 싶다. 하지만 소설 속 안중근이 내가 그리던 안중근과 같다고 이야기하지는 못하겠다.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은 훨씬 뜨거운 세계질서 구상들로 가득하기 때문. 안중근이 전달하고 싶었던 메시지는 법정에서 제대로 다뤄질 수 없었으니, 그의 유작을 꼭 읽어보자. 당대 지식인들이 조선을, 일본을, 세상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짐작이라도 해보자. 내가 배워 알아 온 조선, 일본, 세상과는 다른 어떤 시대가 떠오르기 시작하는 것이다. 

 

"안중근은 서른 한 살로 죽었다."

 


 

p. 66. 이 세상이 끝나는 먼 곳에서 빌렘이 기도를 드리고 있고, 그 반대쪽 먼 끝에서 이토가 흰 수염을 쓰다듬고 있고, 그 사이의 끝없는 벌판에 시체들이 가득 쌓여 있는 환영이 재 위에 떠올랐다. 시체들이 징검다리처럼 그 양극단을 연결시키고 있었다. ... 안중근이 일어서서 물러가려 할 때 빌렘은 돌아 앉아서, 겟세마네의 예수를 향해 기도드리고 있었다. 

 

p. 79. 이토는 통감부와 조선 조정을 거듭 다그쳤으나 거리는 여전히 똥바다였다. 똥은 틀어막을 수가 없었고, 먹고 누는 일을 금할 수가 없었다. ... 날마다 새 똥이 거리에 널려 있었다. 

 

p. 159. 총구를 고정시키는 일은 언제나 불가능했다. 총을 쥔 자가 살아 있는 인간이므로 총구는 늘 흔들렸다. 가늠쇠 너머에 표적은 확실히 존재하고 있었지만 표적으로 시력을 집중할수록 표적은 희미해졌다.

 

p. 89. 이토를 죽여야 한다면 그 죽임의 목적은 살에 있지 않고, 이토의 작동을 멈추게 하려는 까닭을 말하려는 것에 있는데, 살하지 않고 말을 한다면 세상은 말에 귀 기울이지 않을 것이고, 세상에 들리게 말을 하려면 살하고 나서 말하는 수밖에 없을 터인데, 말은 혼자서 주절거리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대고 알아들으라고 하는 것일진대, 그렇게 살하고 나서 말했다 해서 말하려는 바가 이토의 세상에 들릴 것인지는 알기 어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