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리 피사노, 윌리 시 <왜 제조업 르네상스인가>
게리 피사노(Gary Pisano) & 윌리 시(Wily Shih), 2019, 지식노마드 <왜 제조업 르네상스인가>
하산 미나즈의 <Patriot Act>를 보다가 문득 이 책을 정리해야겠다 생각했다. 국경과 산업에 대한 이야기이다.
왜 제조업 르네상스인가
국가의 산업정책에 대한 자유시장 지지자들과 산업정책 옹호자 사이의 오랜 논쟁을 인정하지만 저자들은 미국이 세계에서 가장 시장 지향적인 경제를 가지고 있음에도 가장 오랫동안 기술혁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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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이후 리쇼어링 논의가 말 그대로 숨가빠졌다. 미세먼지에 단련되어 있었던 한국의 마스크 제조 능력은 글로벌 팬데믹이라는 '블랙스완' 상황에서 큰 힘을 발휘했다. 만약 마스크를 제조할 수 있는 공장이 모두 국경 밖에 있었다면 어땠을까. 개연성이 없지 않다. 효율성 추구는 제조 역량을 역외로 내몰았다. 공장이 국경 밖으로 나가 당장 인건비가 줄어드니 좋은 일인 줄 알았다. 이러한 세계적 차원의 제조 재배치로 국가는 전대미문의 위기에 취약해지고 있었다. 극도로 효율적인 제조업을 추구했던, 미국의 이야기이다.
하산 미나즈의 프레젠테이션이자 스탠드업 코미디 <Patriot Act> 중 한 에피소드. 미국 코로나19 확산의 배경을 분석하는 그는 미국 마스크 생산량의 90%가 해외에서 생산되고 있으며, 효율성을 이유로 전염병 대비가 필요하다는 전문가의 경고가 묵살되어 왔음을 보여준다(그 외 많은 재미있는 것들이 다뤄진다). 미국은 효율성 따지며 마스크 생산을 모두 역외로 옮겼다가 대재앙을 맞았다(이외에도 재앙의 원인은 여럿 등장한다). 사회가 전쟁, 질병과 같은 블랙스완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일정 수준 이상의 제조 역량이 필요함을 보여준다.
게리 피사노와 윌리 시의 <왜 제조업 르네상스인가>는 좀 다른 각도에서 접근한다. 제조업을 가까이 두는 것이 혁신에 이롭다는 것이다. 산업은 분리된 경제 단위가 아니다. 각 산업의 기초역량은 진화하며, 이동하고, 새로운 역량이 등장한다. 따라서 어느 산업의 혁신은 연관된 산업의 혁신으로 이어질 수 있다. 특히 암묵지적 성격이 강한 혁신의 경우, 그 노하우가 전 세계에 순환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소요된다. 지리적 근접성이 중요한 이유다. 우리는 정보가 빛의 속도로 흐르는 '평평한 지구'에 산다고 생각하기 쉬우나, 현실에서 정보 이동에는 시간과 비용이 소요된다.
이에 '산업 공유지' 개념이 등장한다. "기업들이 인력, 인프라, 노하우를 지리적으로 공유하는 유기적인 상태" 정도로 정의내릴 수 있겠다. 발전한 산업 공유지는 인력과 인프라, 노하우를 긴밀히 공유한다. 산업 공유지의 특성에 따라 지리적으로 좁거나 넓을 것이다. 특히나 공정을 모듈화하기 어렵고 제조 공정과 분리가 안될수록 근접한 공유가 필요하다. 가까이 붙어 있을 때 혁신도, 성장도 가능하다는 이야기다. 모두 혁신의 뿌리인 지식/정보가 온전히 유통되기에는 생각보다 무겁고,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발생한다.
따라서 어느 한 부분의 기업 경쟁력이 약화되거나 소재지를 옮긴 경우, 다른 분야의 기업 역시 그 경쟁력에 타격을 입는다. 반대로 기업을 역내로 유치하는 것은 인력, 인프라, 노하우 공유가 풍부해짐을 의미한다. 혁신이 등장할 가능성이 커진다. 문제는 이러한 산업 공유지의 효과가 계산기 두드리기 좋게, 선명하게 잡히지 않는다는 데 있다. 눈 앞의 돈만 생각하면 지금 당장 비용-편익 분석을 하면 인건비가 싼 다른 어느 나라로 공장을 옮기고 본국의 본사에서는 경영관리만 하라는 계산이 나온다.
제조업을 역내 또는 인근으로 리쇼어링하는 장기적 정책이 필요한 까닭은 그것이 다수의 일자리를 만들어내고, 갑작스러운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지속적인 성장을 위한 공유지가 되기 때문이다. 특히 아직 산업이 미성숙했고, 상호 연관성이 높을수록 가까이 두어야한다(단순 노동집약적인, 미숙련 노동자를 필요로 하는 제조업은 그 중요성이 떨어진다).
코로나19로 전 세계 경기도 코로나 블루를 앓고 있다. 많은 기업들이 수출시장을 잃고 휘청인다. 냉전 종식 이후, 국경은 어느 때보다 선명해졌다. 미중무역분쟁이 나날이 새롭다. 시장이 다시 국경 안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우울한 지금이 한국의 산업 공유지를 강화할 기회일 수 있다. 훌륭한 인재와 기업이 한국에 머무르는 시기이지 않은가. 어려운 시기인 만큼 높은 혁신 잠재력을 갖춘 제조 도시를 기획할 때이다.
- p.94 "기업(또는 국가)의 기술 혁신 기회는 부분적으로 지역적 상호 보완이 가능한지에 달려 있다."
- p.89 "마셜의 관심사 중 하나는 그가 '산업 지구(the industrial district)'라고 부르는 곳, 즉 같은 산업에 속한 기업들의 지리적 군집화를 설명하는 것이었다. 마셜은 군집이 발생하는 세 가지 이유에 대한 이론을 제시했다. 1) 노동 시장의 인력 수급, 2) 공유 인프라, 3) 스필오버."
- p.157 "경영자들은 기업이 위치한 공유지가 제공하는 역량의 가치를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공급업체의 역량, 인력 기술, (대학이나 직업학교 같은) 지역 교육기관의 질, 고객사의 지식 및 역량에 대한 심층적인 평가가 필요하며, 이들 자원에 지리적으로 근접하는 것이 어떻게 사업에 도움이 되는지에 대한 분석이 필요하다."